2014. 2. 2. 00:32ㆍ[아름다운문화재]/발굴유적
화성 와우리유적은 '서수원-오산-평택간 고속도로 건설사업(지금의 '봉담-동탄 고속도로')'과 관련해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서 발견된 유적입니다.
발굴조사는 2007년도에 문화재 조사기관인 기호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하였습니다.
먼저 설명에 필요한 몇가지 용어를 정의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유구 : 옛적 구조물의 구조와 양식 등을 알 수 있는 흔적들로서, 무덤이나 집자리와 같은 것들의 하나 하나를 말합니다.
*석곽묘 : 돗덧널무덤이라고도 하는데, 땅을 파고 돌을 쌓아 곽을 만든 무덤.
*회곽묘 : 회를 개어 콘크리트 박스처럼 견고하게 곽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안치한 무덤.
*토광묘 :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그냥 땅을 파서 관을 묻거나 시신을 그대로 묻어 만든 무덤.
*부장품 : 무덤 안에 시신과 함께 매장되는 물품으로서, 보통은 피장자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품을 넣는 경우가 많음.
*수혈유구 : 땅을 파서 만든 일반적인 구덩이 형태를 말하며, 보통은 정확하게 성격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임.
*소성유구 : 구덩이 안에서 불을 땐 흔적이 남아 있는 유구로서, 수혈유구처럼 정확히 성격을 알기 힘든 경우가 많음.
이 유적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조성된 석곽묘 5기, 토광묘 42기, 회곽묘 8기를 비롯하여, 수혈유구, 소성유구 등 총 70여기의 유구가 발견되었습니다.
먼저 항공에서 촬영된 유적 전경입니다. 산등성이를 중심으로 오른쪽이 남향사면, 왼쪽이 북향사면입니다. 유구는 거의가 남향사면에 집중되어 있고, 대부분이 무덤들입니다. 그리고 북향사면에서도 소수의 정체불명한 유구들이 조사되었지만, 유적의 주된 성격은 무덤(분묘)이기 때문에 남향사면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무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남쪽 상공에서 찍은 모습입니다. 저 등성이를 중심으로 와우리와 분천리가 구분되는데, 아래쪽에는 한창 발굴조사가 진행중인 분천리유적이 자리해 있습니다. 분천리유적은 당초에는 발견되지 않았었는데, 와우리유적의 발굴조사가 진행되는 중에 조사단에 의해 추가로 발견되어 발굴조사까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발굴하다가 저 아래쪽에도 뭐 있을 거 같은데~하면서 돌아보다가 발견된... 딱 걸린 케이스라고 하겠네요.
남향사면을 조금 가까이 내려 보면, 작은 네모네모들 대부분이 무덤입니다. 역시 무덤은 남향에 써야 좋은가보네요.
그럼 볼만한 유물이 출토된 몇 개 무덤들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대부분 무덤들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만들어졌던 것으로 조사되었으니, 시간순으로 고려시대 무덤부터...
석곽묘는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토광묘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구분됩니다.
먼저 석곽묘는 아래 사진처럼 땅을 파고 돌을 둘러 쌓아 곽을 만들고 시신을 안치했던 형태의 무덤입니다.
위에 쌓여 퇴적된 흙을 제거하고 정리하고 나서 윤곽을 확인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이미 제자리를 벗어난 돌들과 내부의 흙을 손바닥만한 흙손으로 차근차근 제거하고 나면 아래 사진처럼...
이렇게 정리된 모습입니다. 이 석곽묘는 그나마 네 변의 윤곽이 그대로 남아 있긴 하지만, 경사 아래쪽인 오른쪽이 왼쪽보다 상대적으로 자연경사의 침식으로 인해 유실이 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석곽묘의 경우는 형태는 제법 남아 있지만 안에 부장품이 없어서 정확히 만들어진 시기를 추정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네요.
이상은 석곽묘의 대략적인 형태를 설명드렸고, 그럴듯한 유물들이 함께 부장된 볼만한 사례들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이 석곽묘는 보시는 바와 같이 극히 일부의 석곽 부분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유실된 상태인데, 다행이 부장품이 꽤나 남아 있어서 만들어진 시기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유물은 한쪽에 가지런히 부장했네요.
유물이 모여 있는 부분을 조금 가까이서 본 모습입니다. 이런 유물들을 수습해서 정리하면 아래 사진처럼 있어 보이지요.
모두 청자들이고 생긴 형태에 따라서 대접, 완, 접시, 광구병 등으로 구분됩니다. 이들 유물은 대략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유물이 출토된 석곽묘도 그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무덤을 더 보겠습니다.
이 석곽묘는 오른쪽이 경사 위쪽이고 왼쪽이 경사 아래쪽인데, 역시 아래쪽은 침식으로 인해서 엄청나게 유실되었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1차로 내부에 쌓인 흙을 정리하고 난 모습입니다. 안쪽에 또 흰선을 그었는데, 저 부분이 관이 안치되었던 자리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이 썪고 무너져 그 안으로 흙이 쓸려 들어간 흔적을 찾는 것으로서, 아주 미세하게만 흙의 차이가 있어 조사할 때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저 무덤에 관을 썼는지 아니면 관을 안 쓰고 시신만을 안치했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석곽을 제외하고 내부의 흙을 모두 제거하여 정리가 완료된 모습입니다. 특이하게 머리쪽에는 석곽을 쌓지 않고 자연 암반을 그대로 벽면으로 사용했습니다. 머리쪽과 다리쪽으로 나누어 많은 유물이 부장되었네요.
머리쪽에 놓인 부장품들 모습입니다. 왼쪽의 반구병, 그리고 여러가지 청자와 백자(고려시대에도 백자를 만들었습니다)들, 청동숟가락도 보이네요.
이 부장품은 다리쪽에 놓여진 부장품의 모습입니다. 작은 청자기름병, 청동거울, 관정 같은 유물들이 보이네요.
여러 부장품들 중에서 이런 유물들 중 보기 좋게 정리된 모습은 아래에...
위 왼쪽 2점은 청자대접, 오른쪽은 청자반구병, 아래 줄 왼쪽은 백자접시, 중간은 청자기름병, 오른쪽은 백자종자입니다. 주목되는 유물은 아래줄의 백자접시 바닥(굽) 안쪽에 먹물(묵서)로 '思'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본인이 알기로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고려시대 자기에 묵서명이 남아 있는 것인 경주 천룡사지에서 출토된 청자 1점과 저 백자접시 딱 2점 뿐인 것으로 알고 있네요. 저런 유물들은 12세기~13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무덤도 그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유물은 위의 석곽묘에서 출토된 청동거울은 아니고, 다른 토광묘에서 출토된 청동거울인데, 석곽묘 출토 거울과 크기나 모양이 거의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 거울이 출토된 토광묘도 고려시대의 것이 아닌가 추정됩니다. 뭐 이렇게 짜맞추면서 유적의 전체적인 상황을 읽어 간다고 하겠지요.
위에서 석곽묘 몇 기는 보셨고, 아래부터는 고려시대 토광묘를 좀 구경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조사해보니 고려시대 토광묘가 조선시대 토광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게 땅을 파고 만들었더군요.
고려시대 토광묘의 일례입니다. 왼쪽이 발쪽, 오른쪽이 머리쪽입니다. 발쪽에 토기병과 청동숟가락이 보이고, 여기저기 많이 흐트러져 깔려 있는 것은 관에 쓰였던 못들입니다.
발쪽 유물의 출토 모습입니다. 입이 떡 벌어진 토기병과 청동숟가락이 보이네요.
다른 무덤을 보겠습니다.
좀 횡한 느낌입니다. 너무 많이 지형이 깎여 나가서 더 그래 보입니다.
여기에서는 청동숟가락과 청동합(뚜겅이 있는 발)이 출토되었습니다.
다른 고려시대 토광묘들처럼 원래 낮게 파기도 했겠지만, 위쪽의 지형이 많이 깎여 나갔습니다. 하지만 유물은 짭짤하게 남아 있네요.
저 박살난 유물들은 수습해서 복원해 보면, 아래 사진처럼 이뻐집니다.
이 유물들 역시 12세기~13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청동숟가락은 자루 부분에 은입사로 점을 찍어 문양을 넣은 좀 있어 보이는 제품이고, 농기구인 따비가 함께 부장품으로 넣어졌다는 건 좀 특이합니다.
이제 조선시대 토광묘를 몇 기 보겠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고려시대 토광묘보다 한참이나 깊게 판 것이 특징입니다.
조선시대 토광묘의 부장품은 긴 벽면 한 곳을 안쪽으로 깊게 파서 '감실(또는 벽감)'이란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부장품을 넣거나, 관 위나 주변에 부장품을 놓거나, 관 안에 함께 부장하거나 합니다.
이 토광묘는 머리쪽(왼쪽) 한 쪽 벽면에 감실을 만들고 부장한 경우인데, 관이 썪어 무덤 내부의 가운데 부분이 함몰되면서 부장품들이 함께 쓸려 나오던 상태로 출토되었습니다.
옆에서 부장품의 출토 상태를 본 모습입니다. 유물들을 좀 정리한 모습을 보자면...
조선시대 토광묘에서 이런 부장품이 출토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15세기~16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 이후에는 부장품들이 발견되는 사례가 극히 드문데, 16세기 말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라는 크나 큰 사회적 변화로 인해서 당장 먹고 살 그릇도 없는데 하물며 사자를 위해서 묻어 줄 그릇이야...라는 의견이 좀 있습니다.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닌 듯 합니다.
이 무덤은 머리쪽과 발쪽 양쪽에 감실을 만들고 유물을 부장한 약간은 독특한 사례입니다. 역시 내부가 함몰되면서 유물들이 좀 삐져 내려와 있습니다.
발쪽의 감실을 옆에서 본 모습입니다. 병 위에 작은 잔을 뚜껑처럼 덮어 놓은 것이 인상적입니다. 아마 피장자가 생전에 술을 좋아하셨던 듯 합니다.
다음 토광묘는 부장품이 가장 화려했던 토광묘입니다.
이 토광묘의 부장품은 조사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관에 유물들을 함께 부장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발쪽에 엄청 모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좀 자세히 보면 이렇습니다. 중국 명대에 만들어져 수입된 백자청화서수문대접, 국가에서 관리하던 관요에서 생산하던 고급 백자접시와 종자, 청동합, 청동숟가락, 가위 등등등... 깨끗이 씻어 보면...
지금이야 중국산~하면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당시 중국산 자기라 하면 엄청난 재력가나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관요에서 만드는 고급백자들을 저렇게 많이 부장품으로 넣을 수 있었던 것만 봐도 그렇지요.
무덤에서 '조선통보' 2점과 구슬 2점 말고는 다른 특별한 부장품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주 특이한 형태의 무덤이 있어 소개합니다.
사진처럼 2개의 무덤이 터널처럼 연결된 토광묘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아주 극히 드물게 발견되곤 하는데, 뒤쪽이 메인이고, 앞쪽은 일종의 의례적인 입구... 같은 역할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굴조사 당시 2개 토광묘가 연결된 터널 부분 모습입니다. 상황으로 보아 양쪽으로 토광묘 형태를 먼저 파고 중간을 뚫어 연결한 다음에 다시 터널 부분을 메꾼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흙을 털어 낸 후에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본 모습입니다.
위의 토광묘에서 출토된 조선통보와 구슬입니다.
끝으로 회곽묘 1기 소개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사실 회곽묘는 콘크리트만큼이나 사방의 곽이 견고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반적인 토광묘들에 비해서 시신의 소멸기간이 매우매우 깁니다. 수 백년 후에 발굴되는 회곽묘들의 경우에는 인골이 남는 경우가 드물겠지만, 현재에 발굴되는 회곽묘들의 대부분은 인골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다소 혐오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멋지게 남아 계신 인골님들을 소개하기가 좀 그러네요^^. 그래서 간단히만...
땅을 편평히 고르고 윤곽을 잡고 내부에 쌓인 흙을 좀 드러내면 보통은 회곽 두께만큼이나 두껍고 단단한 회 뚜껑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걸 깨 내고 나면 대략 이런 모습입니다. 안에 많은 관재들이 썪어 가는 상태로 채워져 있고, 저 관재들을 정리하면 슬슬 인골님이 모습을 나타내지요.
곽의 벽면 모습입니다. 먼저 안쪽에 목재로 틀을 대고, 물에 갠 회를 채워 넣어 굳히는 방식인데, 층층이 회와 흙을 섞는 비율을 달리해서 저런 모습으로 남게 됩니다.
화성 와우리유적은 지금은 봉담TG 바로 북쪽에서 영원히 잠자고 있답니다.
너무 두서없이 써 내려가서... 혹 읽으시는 분들께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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