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초등학교는 공동묘지 위에 지어졌다?! 청주 운동동 유적<A구역>

2014. 1. 16. 20:09[아름다운문화재]/발굴유적

지금도 초등학교에 그런 소문들이 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옛날 국민학교시절에는 학교마다 그런 소문이 있었습니다.

'학교가 공동묘지 위에 지어져서 밤마다 귀신이 나온다는...^^'

직업으로 문화재조사를 하면서 느낀 건, 그 말이 맞는 말이기도 하겠구나~ 입니다. 물론 귀신을 본 적은 없지만요.

 

청주 운동동에 있는 운동초등학교의 경우도 그 말에 해당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합니다.

이건 무슨 말이냐면, 아래 사진처럼 운동초등학교 자리가 원래 구릉지였는데 학교를 짓기 전에 발굴조사를 해 본 결과 100기 이상의 무덤이 발견되었었지요. 하지만 학교를 짓기 위해 그 구릉을 싹 밀어버리고 평지로 만들어 무덤은 모두 사라진 후에 학교를 지었으니 맞기도 하고 안맞기도 한 상황인거죠^^.

 

이 사진은 지금의 운동초등학교가 만들어지기 전의 운동초등학교 자리입니다. 원래 운동초등학교는 이 언덕 뒤편에 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나무가 몇 그루 있고, 나머지는 대부분 밭으로 쓰던 자리였는데, 저 속에 그렇게 많은 무덤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했을 겁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유적들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아파트를 짓거나 길을 내기 전에 문화재를

구원하는 차원에서 조사가 이루어지고, 대개는 그 동네 이름을 따서 'ㅇㅇ동유적', 'ㅇㅇ리유적'이라고 이름이 붙지만

정말 중요해서 보존되는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발굴조사가 끝나면 공사와 더불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 터와 조사된 자료들만 남게 되는 거지요. 

 

오늘 소개할 <청주 운동동유적>도 운동동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었습니다.

운동동유적은 지금의 청주 운동초등학교와 운동중학교를 짓기 위한 문화재조사를 통해서 발견되어, 2005년 6월부터 2006년 4월까지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의 운동초등학교는 원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운동중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운동중학교가 그 자리에 지어지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운동동유적에서는 선사시대인 청동기시대 집자리, 한참 뒤인 통일신라시대 돌무덤, 또 한참 뒤인 조선시대 집자리와

건물지, 무덤 등 여러 시대에 걸쳐 사람들이 생활하고 죽어 간 흔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굴조사는 아래 사진처럼 A구역부터 C구역까지 3개 지점으로 구분하여 진행하였습니다. 원래 있던 운동초등학교가

보이네요.

 

학교부지는 더 넓은데 왜 저렇게 부분적으로만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는가 하는 건, 유적이 있을만한 범위를 미리 조사해서 알아볼 수 있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은 시굴조사라고 하는데, 아래 사진처럼(A구역) 막대기 형태로 땅을 샘플링해서 파 보면, 확실하게 과거의 흔적들(흰색 선들)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발굴조사는 저렇게 유적이 없는 범위는 제외하고 확실히 과거의 흔적이 있는 범위만을 압축해서 진행하게 됩니다. 유적이 없는 곳은 팔 이유가 없겠지요~

 

그럼, 청주 운동동유적에서는 어떤 것들이 그 오랜 시간동안 잠들어 있었는지 구역별로 대표적인 것들을 들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A구역부터... 

A구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집자리 3기, 조선시대 집자리 1기, 언제인지 모르겠는 주거지 1기 등 5기의 집자리, 통일신라시대의 토광묘 2기와 돌을 쌓아 만든 석곽묘 1기, 그리고 조선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토광묘가 무려 121기, 역시 조선시대에 콘크리트 박스처럼 만든 무덤인 회곽묘 3기 등 여러 시대에 걸친 다양한 형태의 흔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A구역 발굴조사가 끝나고 찍은 항공사진입니다. 약간 기름하게 생긴 네모 모양이 가장 많이 발견된 조선시대 이후의 토광묘들입니다. 가히 공동묘지라고 할만 하지요. 그리고 꼭대기쯤에 좀 큰 네모형태가 청동기시대 집자리입니다.

그럼 먼저 오래된 놈부터... 청동기시대 집자리부터 좀 자세히 볼까요.

 

청동기시대 집자리의 조사하는 모습입니다. 땅을 편평하게 긁어 집자리 형태를 찾은 다음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10세기 전후를 청동기시대로 보니까 수 천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다가 빛을 본 셈입니다. 원래는 요즘 식으로 하면 반지하식인데, 그 오랜 시간 동안 땅도 많이 깎여 나가서 벽체가 별로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가운데에 둑처럼 남긴 건, 어떤 식으로 내부의 흙이 퇴적되어 왔는가를 살펴보기 위한 것입니다. 저렇게 내부를 파 내면서 묻혀 있던 유물이나 내부 시설물을 천천히 찾아 가게 됩니다.

저 집자리는 긴 쪽이 13m, 짧은 쪽이 6.5m나 되는 대형에 속하는 집자리로, 개인 주택이라기 보다는 지금의 마을회관관 같은 역할을 했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둑을 없애고 내부를 1차적으로 정리한 모습입니다. 안에 검고 길죽길죽하게 보이는 것이 불에 탄 목재로서, 당시에 나무를 켜서 벽을 세웠었고, 어느 날 화재가 발생해 벽체가 불에 타면서 안으로 쓰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 아래쯤에 돌이 둥그스름하게 모여 있는 것은 불을 피웠던 화덕자리이고, 양쪽으로 열을 맞춰 놓여진 돌들은 그 위에 기둥을 올렸던 기둥받침이라고 보면 됩니다. 

 

불 탄 목재가 깔렸던 층을 정리한 2차 정리 후 모습입니다. 기둥을 받쳤던 돌들의 배열과 화덕자리가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벽을 따라서 작은 구멍들이 있는데, 이 구멍들도 기둥을 세웠던 구멍들이고, 안쪽으로 조금 큼직한 구멍들은 당시 그릇이었던 밑이 둥근 토기들을 세워두거나 저장시설로 썼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집 중앙부분에 있었던 불을 피웠던 화덕자리입니다. 요즘도 야외에서 불을 피울 때 하는 것과 많이 비슷합니다.

 

저 집자리를 조사하다가 유물들이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맨 위 왼쪽이 유명한 반달돌칼, 오른쪽이 돌로 만든 대패, 아래 두 점은 뭔지 아시겠죠? 화살촉입니다. 그 오래 전에도 딱딱 마름모형태로 각을 맞추고 정교하게 만든 걸 보면 당시 사람들의 손재주가 놀라울 뿐입니다.

 

그리고, 또 한 채의 청동기시대 집자리. 앞에 본 집자리보다 아주 많이 지형이 깎여 나가서 남아 있는 상태가 아주아주 좋지 않습니다.

사진처럼 거의 집자리의 절반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벽을 따라 작은 기둥구멍들이 보이고, 안쪽으로 역시 기둥을 받쳤던 돌 열이 좀 보입니다. 가운데 동그라미는 위에 집과는 달리 돌을 돌리지 않고 그냥 바닥에 불을 피웠던 자리로서, 실제로 보면 벌겋게 그을려 있는 정도입니다.

 

사진은 저 집을 조사하면서 발견된 유물인데, 들어본 적이 있음직한, 붉은간토기 혹은 홍도라고 합니다. 토기처럼 약한 재질의 유물들은 거의 다 저렇게 깨진 상태로 출토되기 때문에 잘 추려 수습해서 씻어 말린 다음에 접착제로 붙여 복원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다가 떠나고 천 수백년이 흘러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통일신라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집자리는 운동동유적에서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 당시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니 근처에 분명히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생활터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생긴 무덤인지 보겠습니다.

 

비교적 작은 크기의 무덤인데, 돌로 쌓아서 만들었다고 하여 석곽묘라고 합니다. 보통 매장할 때는 사후세계관에 따라서 시신과 함께 그릇이나 수저, 돈 같은 것을 함께 넣어주는데, 이런 것을 부장품이라고 합니다. 안에 부장된 토기가 보입니다. 수습해서 깨끗이 닦아 깨진 부분을 접합해서 복원하면 아래 사진과 같아지죠. 뚜껑이 있는 발과 뚜껑이 없는 발이 출토되었습니다.

 

또 다른 형태의 통일신라시대 무덤으로 토광묘가 발견되었습니다. 돌로 무덤을 축조한 구조물이 발견되지 않아 토광묘라고 했지만, 원래 자연적인 훼손이 심해서 벽체를 이루던 돌구조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 돌로된 구조물이 조금 있긴 합니다. 바닥에 깔린 저 돌들은 시상대라고 해서 시신을 안치시키기 위해 깔아 둔 겁니다. 여기에도 토기들이 부장된 모습이 확인됩니다.

조금 자세히 보면 아래 사진처럼 남아 있습니다. 이 정도면 꽤나 양호한 상태로 출토된 것이지요.

 

 

 

 

청동기시대, 통일신라시대를 지나 또 수 백년 동안 운동동유적 일대는 또 사람들의 생활터전이 아니었나 봅니다.

조선시대까지 넘어와서야 다시 집자리와 엄청나게 많은 무덤(토광묘)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절반 정도만 남아 있는 조선시대 집자리입니다. 아래쪽이 경사지로 깎여 나가 저만큼만 남아 있습니다. 왼쪽 위에 검게 그을린 부분이 불을 피웠던 자리고 그 위에 벽쪽으로 몇 개 돌을 쌓아 올려 굴뚝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래 중간 부분에 도자기 한 점이 엎어져 있는데 분청사기 사발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초가집이나 기와집에서 살았을텐데... 저런 집자리는 앞에서 본 청동기시대 집자리처럼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대충 기둥을 세우고 짚이나 풀 같은 것을 올린 선사시대 움집 같은 형태였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저런 형태의 조선시대 집자리들이 발굴조사를 통해서 많이 발견되는데,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하던 집자리였다는지,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시켰던 임시 수용시설이라든지, 무덤 옆에서 발견되었을 경우는 부모 묘를 지키며 3년상을 치르던 시묘살이의 임시 거처였다든지... 몇 가지 가설이 있지만 아직 정확한 건 살아보지 않아서 아무도 모른답니다.

 

다음은 조선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토광묘들을 몇 기 살펴보겠습니다.

보통 무덤은 단순하게 무서운 시설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발굴조사에서 무덤은 가장 좋은 형태의 유물이 출토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또 나름의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사람뼈들도 엄청나게 자주 보게 됩니다^^. 

무덤에서 좋은 상태의 유물이 발견될 수 있는 건, 보통 집자리 같은 경우는 사람들이 살다가 쓰던 그릇들이나 도구를 버리고 떠나면 집이 무더니고 흙이 떠밀려와 쌓이기 때문에 앞에서 본 것처럼 대부분 유물이 깨진채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무덤은 시신과 부장품(없는 경우가 더 많지만...)을 묻고 다시 고르고 단단하게 흙을 채워넣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대부분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발굴조사 중인 무덤의 모습입니다. 넓게 파고 들어가다가 관을 넣을 정도로 좁혀서 2단으로 만든 토광묘입니다. 안에 관재 일부가 남아 있고 여러 가지 부장품들이 보입니다. 저렇게 유물을 부장하기 위해 한쪽을 다시 옆으로 파서 만든 공간을 보통 감실이라고 합니다. 조금 더 확대해 볼까요.

 

 

감실 안에 청동합, 청동거울, 백자사발, 청동숟가락, 정체불명의 철기가 보이고, 아래쪽에는 관재, 여러 개의 구슬, 그리고 잘 보면 반지도 2개 있네요.

 

다른 무덤도 한 번 보겠습니다.

 

 

 

이 무덤도 원래 위에 무덤처럼 깊었을텐데, 땅이 많이 깎여 나가 거의 바닥만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장품은 잘 남아 있습니다. 확대해서 보면...

 

 

여기도 청동숟가락과 백자사발이 있고... 특이하게 벼루가 출토된 사례입니다. 안쪽에 네모형태로 엎어져 있는 것이 벼루입니다. 벼루가 함께 묻힌 것으로 보아 아마도 묻혔던 사람은 선비였나 봅니다.

 

 

다른 무덤은 또...

 

위에서 봤던 감실의 구조가 잘 보입니다. 역시 백자사발과 청동숟가락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닥 한 가운데에도 백자사발이 있는데, 유물을 부장하는 저 위치는 요갱이라고 부릅니다. 조금 크게 보면...

 

이렇습니다. 백자사발... 엄청 큽니다. 요즘 사람 밥 한 공기를 기준으로 4~5공기분은 될 겁니다.

 

끝으로 토광묘에서 나왔던 유물들을 몇 장 깔끔한 상태로 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가지 백자사발과 접시, 종지들입니다.

 

 

 

청동발과 숟가락, 그리고 젓가락들입니다. 숟가락 뒤에 장식들이 이색적입니다. 숟가락을 잘 살펴보면 오른쪽부분보다 왼쪽부분이 더 닳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으로 묻혔던 사람이 오른손잡이란 것과 생전에 쓰던 물건을 함께 부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슬들은 갓끈입니다. 당연히 묻힌 사람은 남자였겠지요^^.

 

너무 길어져서 여기서는 청주 운동동유적의 A구역만 소개하고 마무리하고, 다음 게시물에 B구역과 C구역을 소개해야겠습니다.

 

[사진 출처 : 중원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