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18. 15:40ㆍ[아름다운문화재]/발굴유적
먼저 청주 운동동유적의 A구역을 소개했었는데, 스크롤이 너무 길어져서 B구역과 C구역은 여기서 따로 소개합니다.
이전 게시물에서도 소개했지만, 운동동유적은 아래 사진처럼 3개 지점으로 나뉘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B구역은 중간 부분에 있고, 원래 있던 운동초등학교 운동장 일부까지 유적이 퍼져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조선시대 전기의 건물터 2동, 집자리 4기, 기타 정체가 불분명한 흔적들 80기 정도가 발견되었습니다.
아래쪽이 B구역이고, 뒤쪽 언덕 위가 A구역입니다. 원래의 운동초등학교는 철거작업이 한창이네요.
조금 더 내려가서 보면... 오른쪽 아래 부분에 바닥판처럼 돌무더기를 선으로 이어 놓은 부분이 건물터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위쪽으로는 좀 큼직한 것은 조선시대 집자리이고, 뭔가 불을 땠던 흔적들도 있고, 길게 배수로 역할을 했던 구상형태의 흔적들도 보입니다.
그럼 건물터를 먼저 볼까요. 아래 사진이 건물터 부분의 모습입니다.
건물터는 2동이며, 흰선과 노란선으로 구분해 놓은 것입니다. 당연히 기와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 둥글게 모여 있는 돌무더기들은 '적심'이라고 하는데, 땅을 약간 파서 저렇게 굵직한 돌들을 먼저 묻어 기반을 단단히 한 다음에, 그 위에 우리가 흔히 보는 기와집 건물 기둥 아래에 놓이는 큼직한 초석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나무기둥을 올립니다. 그래야 든든히 엄청난 무게의 지붕을 받칠 수 있습니다.
흰선의 건물터는 정면이 5칸, 측면이 3칸의 건물이고, 노란선의 건물터는 아래쪽이 유실된 부분이 많아서 정면 5칸에 측면은 2칸만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절반 정도는 훼손된 상태인 온돌시설이 갖춰진 집자리가 오른쪽 아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대충 상황은 흰선의 건물이 있다가 없어진 후에 반지하식의 온돌집이 생겼다가 없어지고, 그리고 나서 노란선의 건물이 새로 지어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출토된 유물로 보아서 조선시대 전기의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래는 흰선 건물터와 노란선 건물터의 적심을 한 개씩 자세히 본 사진입니다. 안에 채워진 돌의 크기가 서로 다른 것으로도 서로 다른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운동동과 인근의 방서동 일대는 예로부터 청주한씨의 시조를 두고 지금까지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저 정도 건물을 지으려면 어느 정도 권세가 없으면 불가하기 때문에, 저 건물터는 조선시대에 이 일대에서 권세를 누렸을 청주한씨의 후손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온돌 집자리를 잠시 보고 넘어 가겠습니다.
아래 부분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지형변화에 따라서 유실된 상태였습니다. 흰선 건물터의 적심석 일부가 남아 있고, 오른쪽 끝과 위쪽 중간에는 집자리가 없어진 이후에 만들어진 노란선 건물지의 적심이 보입니다.
집자리는 왼쪽에 둥그스름한 구조로 만들어진 온돌시설이 있고, 오른쪽은... 요즘으로 하면 거실이나 마루 정도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온돌구조는 앞에 구멍난 부분이 아궁이고, 돌을 세워 만든 불길이 여러 갈래로 퍼졌다가 다시 한쪽으로 모아져 연기가 빠져 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구들장은 몇 개만 남아 있고 대부분 없어진 상태입니다.
운동동유적의 발굴조사 당시, 위에서 살펴 본 건물터는 청주지역에서 흔히 발견되지 않는 조선시대 전기의 건물터로서 중요성이 크다고 판단되었고, 그에 따라서 훼손을 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보존시킨 다음에 학교를 지으라는 결정이 내려졌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처럼 적심들을 보호하고, 흙을 다시 메운 다음에 지금의 운동중학교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운동중학교 아래에는 조선시대 건물터가 역사를 끌어 안고 잠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C구역에서는...
관련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시대를 알 수 없는 과거의 논 경작층, 조선시대 집자리와 건물터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C구역 전체 모습입니다. A구역과 B구역은 새로 운동초등학교와 운동중학교를 서둘러 짓느라고 이미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로 위에서 내려다 본 C구역 모습입니다. 왼쪽으로 둥그스름한 3개가 조선시대 집자리이고, 작은 동그라미들이 빼곡히 그려진 오른쪽의 편평한 바닥은 오래 전에 논으로 사용되던 곳인데,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어느 시기에 논으로 썼는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 동그라미들은 당시 밟혔던 발자국들입니다.
모여 있는 조선시대 전기의 집자리들입니다.
한 집자리를 자세히 보면 이렇습니다. 뒤쪽에 돌들이 모여 있고 바깥쪽으로 뽈록 나온 부분이 불을 때고 굴뚝으로 썼던 부분입니다. 바닥에 깔려 있는 것들은 당시에 쓰던 도자기와 토기편들입니다.
아궁이와 굴뚝으로 썼던 부분을 정리하면 저렇게 생겼네요.
저 집자리에서 유물이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저 도자기는 분청사기라고 하는데, 분청사기는 고려시대 청자기법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변화하면서 조선시대 전기인 15~16세기경 딱 200년 동안만 만들어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명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제치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만들어졌던 저 분청사기의 문양이나 기법이 요즘 집안에서 쓰이는 도자기의 기법과 문양에 가장 많이 쓰이는데, 오래 봐도 질리지 않고, 은근하면서도 서민적인 매력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쪽에서 발견된 건물터입니다. 앞쪽에 배수로처럼 보이는 부분 말고는 너무 훼손이 심해서 어떤 상태였는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많은 유물들이 저 돌들 속에 섞여서 출토되었습니다.
동그라미 안에 보이는 것들이 토기와 자기 같은 유물들입니다. 특히 저 왼쪽 동그라미 안의 유물은 인화문이 빼곡히 베풀어진 분청사기 접시인데, 명문이 있어서 중요한 유물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가운데에 '청주(淸州)'라고 적혀 있어 주목됩니다.
분청사기에는 제작된 지방이름과 상납하는 관사이름이 적혀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당시에 도자기는 매우 중요한 상납품 중 하나였는데, 중간에서 자꾸 빼돌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 아예 그렇게 관사이름과 지방이름을 새겨서 굽도록 했답니다.
저 분청사기 접시에도 관사이름과 청주라는 지방이름이 함께 있었을 것인데, 깨져 나간 부분이 많아서 관사이름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분청사기 중에 '청주'가 새겨진 것으로는 유일한 자료로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간단하게나마,
공동묘지 자리에(?) 지어진 운동초등학교와, 조선시대 건물지를 품고 지어진 운동중학교 자리에서 발견된
<청주 운동동유적>을 소개해 봤습니다.
늘 우리 주변에는 유적과 역사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사진 출처 : 중원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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