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문화재]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2015. 11. 22. 16:50[아름다운문화재]/사적

 

익산 왕궁리 유적은 최근에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백제 관련

   중요 유적 중 한 곳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과 정리사지와 능산리 고분군과 나성,

   그리고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산80-1번지 일원에 위치해 있으며,

   1998년 9월 17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면적은 218,155㎡에 이른다.

 

주차를 하면 가장 먼저 웅장한 현대식 건물이 눈에 띄는데, 바로 '왕궁리 유적 전시관'이다. 지나다 잠시 짬을

   내어 들린 터라 전시관을 돌면 왕궁리 유적을 못 볼 거 같아 관람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좌향 앞으로 가...

 

왕궁리 유적을 향해 발길을 돌리면 멀리 유적이 보이고, 바로 앞에 턱하니 최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표지석이 당당히 앞을 가린다.

 

 

[왕궁리 유적 안내판]

왕궁리는 예로부터 왕궁평, 왕검이, 왕금성으로 불려,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유적은 고대 백제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사찰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왕궁 유적과

   사찰 유적이 함께 남아 있다. 발굴 조사 결과 백제 무왕(600~641) 때 왕궁으로 조성된 이후 백제

   말에서 신라 초기에 사찰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왕궁은 규모가 동서 약 240m, 남북 약 490m이다.

성벽을 쌓고 나서 내부 경사면을 따라 석축으로 단을 만들어 대지를 조성하고 건물을 지었는데, 왕궁 내에서

   물과 조경석을 이용한 조경시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적지 내에는 왕궁 건물터와 금당金堂

   등의 사찰 건물터가 여럿 남아 있다. 사찰 유적 중 국보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제289호)은

   조형미가 뛰어나 백제계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왕궁리 유적에는 마한의 기준箕準 도읍설, 백제 무왕武王의 천도설, 후백제 견훤甄萱의 도읍설 등 다양한

   견해가 얽혀 있는데, 최근의 연구로 백제 궁성의 구조와 기능 등 역사 속 비밀이 하나 둘씩 밝혀지고 있어

   왕궁리 유적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지평이 열리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왕궁리성지 라고도 부르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발굴조사한 결과, 이 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특히 탑을

   에워싼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평지성으로 생각되는 성곽 유물을 찾았다.
성곽의 모습은 현재 발굴을 통해 점점 드러나고 있다. 또한 성곽 안팎으로 폭이 약 1m정도로 평평한 돌을

   깔아 만든 시설이 발견되어 성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지역 안에 있는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과 절터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의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왕궁리유적 → 익산 왕궁리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유적의 중심축은 거의 남북방향으로 잡혀 있고,

   입구의 이 관람안내도는 현재 복원 정비되어 있는 공간까지만 표시되어 있다.

 

옆의 다른 안내판의 전경사진을 보면 현재 관람이 가능한 훨씬 북쪽 뒤편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이 영역에 대한 복원 정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유적 안으로 들어가 보자.

 

입구에 서면 좌우로 뻗어 있는 남측 궁궐 담장(성벽)이 시원하게 뻗어 있다.

 

남측 궁궐 담장의 동쪽 부분이다.

 

[남측 궁궐 담장 안내판]

궁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으로 동서 길이가 약 240m, 남북이 약 490m의 직사각형이다. 담장의 폭은 3m

   정도로, 잘 다듬은 석재를 쌓아 올려 만들었다. 담장의 안팎으로 돌을 깔아 보도(부석시설敷石施設)를

   만들고, 담장 경계인 석렬시설石列施設을 설치하였다. 부속시설로는 물 빠짐을 위한 수구와 배수로가 있고,

   동서북측에 각 1개소, 남측에 3개소의 궁궐문터가 발견되었다.

 

남측 궁궐 담장의 서쪽 부분이다.

 

 

한쪽에는 유적 안에서 출토된 많은 석재들을 가지런히 모여 있다.

 

아주 오래 전 그 시절 석공의 손길과 함께...

 

가장 앞쪽의 대형 건물터이다. 왕궁리 유적 안에서 가장 큰 규모로서, 정면 7칸(31m), 측면 4칸(15m)이다.

크기나 건축기법, 위치 등으로 보아 대규모 집회나 연회 등에 사용한 건물로 추정된단다.

 

유적 한 가운데에는 국보인 왕궁리 오층석탑이 당당히 솟아 있다. 백제와 관련이 깊은 유적이지만, 이 탑은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스며있는 고려시대 전기의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적의 서쪽편은 지금도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남쪽 부분.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남쪽 부분.

 

진행 중인 발굴조사지역에 대한 정보는 옆에 자세한 안내판을 세워 이해를 돕고 있다.

 

 

 

 

 

 

 

대형 건물터 서쪽편에 위치한, 출입시설로 추정되는 건물터이다.

 

왕궁리 오층석탑의 서쪽편의 건물터는 왕궁의 행정업무를 맡아 보던 정청政廳으로 추정된다.

 

정청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터는 한 건물에 방 두 개가 있는 건물 두 채가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있다.

 

석탑이 북쪽으로 거의 붙어 있는 건물터는 사찰의 중요한 건물이었던 정도로만 추정되고 있다.

 

 

가장 뒤쪽에 자리한 강당터이다.

 

강당터 중앙에서 석탑쪽으로 본 전경. 그 중간의 건물터는 금당터이다.

 

강당터 뒤로는 발굴조사 후 정비를 기다리고 있는 예정지이다.

 

정비 예정지에서는 정원과 후원 등이 조사되었는데, 안내판을 참조하시길...

 

 

 

강당터 동쪽편의 와적기단 건물터이다. 와적기단은 기단 외부에 기와를 쌓아 장식하는 기법이다.

 

와적기단 건물터의 바로 남쪽에 있는 또 다른 건물터.

이런 정비 복원된 건물터는 가 보면 그냥 저런 상태이니 보기에 심심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형태의 목조건축물이 들어서 있다고 상상하면서 관람하면 조금은 덜 심심할지도 모르겠다.

 

남북방향의 석축. 현재 약 30m 정도가 남아 있으며, 사찰의 대지를 조성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되고 있다.

 

석탑의 동쪽으로 약간 떨어져 위치한 기와 가마터. 통일시라시대에 축조되어 사용되었다고 한다.

 

 

저녁 무렵엔 제법 예쁜 풍경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