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의 유적] 국내 최대 규모의 원삼국시대 환호취락, 홍성 석택리유적

2015. 9. 25. 21:32[아름다운문화재]/발굴유적

 

홍성 석택리유적은 충남도청 이전 신도시인 내포시와 예산수덕사I.C를 잇는 진입도로 건설공사와 관련해

   실시한 문화재조사를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건설공사 시행에 앞서 문화재의 유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첫 단계인 지표조사에서 유적의 유존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발굴조사까지 진행되면서 유적의 전모가

   드러났으나... 현재까지 확인된 원삼국시대 유적 가운데 환호취락으로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어 그 중요성이 심각하게 대두되면서 국내 최초로 발굴조사 진행 중에 그대로 보존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던 유적이다.

현재는 일부만 발굴조사가 완료된 상태에서 다시 복토하고, 언제가 될지 모를 훗날 발굴조사가 재개되기를

   기다리며 잠자고 있다.

 

항공촬영한 석택리유적의 전경이다. 유적은 나지막한 구릉지 정상부를 중심으로 자리해 있다.

유적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석택리 일원에 위치해 있고, 발굴조사가 진행된 면적은 31,000㎡로,

   1만평 정도 되는 넓이이다. 유적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조사가 진행되었고, 사진 뒤편의 광활한 대지는 

   당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던 내포신도시의 모습이다.

 

홍성 석택리유적의 핵심은 말한대로 원삼국시대 환호취락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물론 발굴조사에서는 원삼국시대 유구 이외에도 청동기시대 주거지도 나왔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주거지나 토광묘 등등 1,000여기가 넘게 확인되었지만, 수량적으로나 중요성으로나 핵심은

   원삼국시대 환호취락이다.

환호취락은 마을의 주위에 도랑을 파고 물을 채우거나 목침 등을 설치해서 짐승이나 외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시스템을 갖춘 마을 형태를 말한다.

 

조금 더 가까이 보면,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마을이 자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적의 핵심부인 환호취락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장타원형으로 마을을 두르고 있는 띠 같은 것이

   환호이고, 그 안쪽으로 뭔가 많이 그려진 네모네모들이 원삼국시대의 집터들이다. 사진이라서 감이 떨어지지만,

   환호의 직경은 150m가 넘고, 그 안에 집터들은 수백채에 달한다.

 

 

석택리유적이 원삼국시대 유적으로서 주목받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림처럼 사람들이 살던 공간, 죽은 사람을 묻는 분묘공간, 그리고 생활용기 등을 만들던 생산공간 등이

   대체적으로 확실한 공간을 가지고 구분되어 있으면서, 한편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세한 설명은 유적의 미래처럼 훗날 새로운 기회로 미뤄두고, 간단히 사진 몇 장으로나마 유적 구경...

 

먼저 시대상으로 가장 오래된 청동기시대 주거지들의 모습이다.

장방형의 집터로서, 두 측면은 오래고 오랜 세월과 함께 유실되었다. 저 수 많은 구멍들은, 조금 큰 것은

   토기를 세워 두거나 음식물 등을 저장했던 저장 구덩이였을 것이고, 작은 구멍들은 기둥을 세웠었을 것이다.

 

여긴 다른 집. 붉은 동그라미는 집 안에 불을 피웠던 자리이다. 난방도 하고, 음식도 익히고...

   그러다 보니 화재도 빈번했을 듯...

 

집 안에 그대로 남아서 수 천 년을 잠자던 토기들은 저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고, 저런 조각들은 수습해서 세척하고

   다시 접합해서 아래아래의 사진처럼 원형을 복원하게 된다. 집터 아래 깊은 구덩이는 훗날 만들어진 토광묘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몇 채 안되지만,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의 모습. 소위 무문토기, 방추차, 돌칼 등등...

   완전 박살난 토기들은 저렇게 붙이고 땜빵해서 자기 모습을 찾게 된다.

 

다음은 원삼국시대 주거지 몇 채의 모습이다.

보이는 것처럼 바닥만 남아 있다. 발굴해서 나오는 집터들은 모두 저럴 수 밖에 없으니까.

난방과 취사를 위해 만들어진 아궁이로부터 벽을 따라 구들을 만들어 난방 효율을 높였다. 청동기시대 집터보다

   확실히 발전된 시스템이다. 마찬가지로 완전 박살난 상태로 출토된 유물들은 아래처럼 최종적으로 복원된다.

 

뒤편의 길고 커다란 토기는 긴 계란처럼 생겨서 장란형토기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원삼국시대 주거지에서 나온 토기들이다. 아가리가 넓고 바닥이 편평한 항아리라 하여

   평저광구호라고 부른다.

 

다음은 원삼국시대 무덤인 분묘공간의 모습이다.

정상부쪽으로 갈수록 무덤의 규모가 커지는 것으로 보아, 지위나 권력이 높았던 사람일수록 위에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삼국시대 무덤 중 몇 개. 가운데가 시신을 안치하는 토광이고, 주위에 도랑처럼 돌린 것은 주구라고 한다.

대체적으로 이렇게 생긴 묘를 주구토광묘 또는 분구묘라 하는데, 용어는 여러가지 특징들에 따라 차이를 두고

   사용한다. 

 

원삼국시대 주구묘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토기는 양쪽에 귀처럼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라 하여

   양이부호라 부르고, 아래는 칼과 창과 도끼와 같은 철기들이다.

 

다음은 많지는 않지만, 함께 조사된 백제의 토광묘들이다.

 

백제 토광묘에서 출토된 토기와 철기 등의 유물이다.

 

환호취락지 아래쪽의 완만한 사면으로는 원삼국시대의 가마와 같은 생산시설도 있지만, 보다 많은 건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토광묘들이다. 

 

고려시대 토광묘에서 출토된 청자와 수혈유구에서 출토된 토기 합이다.

 

끝으로, 조선시대 토광묘에서 출토된 백자들과 청동그릇, 청동숟가락 등이다.

 

구석기시대 유적 하면, 공주 석장리나 단양 수양개를 떠올리듯이, 조만간 원삼국시대 유적 하면, 홍성 석택리유적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유적이다.

석택리유적은 흔히 알고 있는 마한 54개국 가운데 일국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정되는 만큼,

언제 발굴조사가 마무리될런지는 모르겠지만, 발굴조사도 완벽하게 마무리되고, 보다 더 훗날 멋진 유적공원으로

   재탄생해서 홍성과 예산, 그리고 내포시의 대표 문화관광지로 거듭나 후손들의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한 몫을

   해 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사진 출처 및 내용 참조 : 한얼문화유산연구원 발간, [홍성 석택리유적 발굴조사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