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31. 18:35ㆍ[아름다운문화재]/사적
재작년 여름에 다녀왔는데 이제서야...
읍성 내 곳곳에 나름 볼거리가 풍성한 읍성이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ㅇ 지정번호 : 사적 제231호
ㅇ 지 정 일 : 1972. 10. 14
ㅇ 소 재 지 :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00-1번지
ㅇ 시 대 : 삼국 ~ 조선
ㅇ 상세설명 :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2012년에 남문인 홍화문을 복원하였다.
이 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조양문 안내문]
이 문은 홍주읍성의 동문으로 조선 1870년(고종 7)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이다. 홍주읍성의 문은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는데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현판을 하사하였다. 북문은 역새 목사나 영장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1894년 동학운동 때는 동학군이 여기서 처형되었다. 1906년(광무 10)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하려 하였으나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되었고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모습을 찾게 되었다.
[홍화문 안내문]
홍주읍성은 사적 제23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성곽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10m의 돌로 쌓은 성벽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 지방 읍성을 새로운 규정에 맞추어 쌓게 되었을 때, 홍주읍성도 새로 쌓아 1451년(문종 1)에 완성하였다. 이 때의 기록에 '홍주읍성은 문이 4개소에 그 중 1개는 옹성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 후 홍주읍성은 여러 차례 보수 확장하였고, 1870년(고종 7) 홍주목사 한응필이 대대적으로 홍주읍성을 보수하고 새로 정비하였고, 같은 해 흥선대원군이 직접 써서 내려준 현판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였다. 하지만 남문 이름은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는 사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07~2009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확인되었고, 옹성은 발견되지 않았다. 2013년 복원되어 홍화문이라 이름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회당 안내문]
홍주목은 충남 서해안 가운데에 위치한 홍성의 옛이름으로 조선 초 행정구역 개편 시 주변 19개 군현을 관할하던 지역의 중심지였다. 안회당은 홍주목 관아의 동헌으로 22칸의 목조 기와집이다. 1977년 해체 복원 중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78년(숙종 4)에 처음 지어졌고, 1870년(고종 7) 한응필 목사가 크게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이곳은 동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안회당'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안회당'이라는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하사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안회당'이라는 이름은 논어의 '노자안지老者安之 붕우신지朋友信之 소자회지少者懷之'에서 인용한 것으로 안회는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은 믿음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현판은 광복 이후 분실되어 1991년에 안회당을 보수하면서 현판과 당기를 새로 제작하였다.
[여하정 안내문]
여하정은 안회당의 뒤뜰에 있는 작은 연못에 세워진 정자이다. 1896년(고종 33) 이승우 관찰사가 옛 청수정 자리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 역대 홍주목사들이 관아 일을 돌보다가 휴식을 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자는 육각형의 나무기둥 6개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기둥에는 오언시가 주련으로 각 2개씩 총 12개가 걸려 있다. 작은 규모의 정자이지만 고목과 연못의 연꽃들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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