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서안 문화재] 양귀비의 목욕탕, 화청지

2015. 12. 9. 23:46[다른나라답사]

 

화청지華淸池는 서안에서 30km 정도 떨어진 여산驪山 산록에 있는 온천으로서,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었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원시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갈수 있는데, 일찍이 6,000년 전의 씨족사회 때 원시인들의 

   활동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서주西周 말기 주유왕周幽王은 여기에 여궁驪宮을 세웠고,

   진시황은 여산탕驪山湯을 건설하였다. 한무제때 진시황이 건설한 기초 위에 더 건설 장식하여 황당석정皇堂石井

   만들었다. 수문제隋文帝 개황 3(583) 화청지를 더욱 더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하여 측백나무 1000여 그루를

   심어 그 풍경을 절경에 도달하게 했다. 그리고 정관 18(644)에는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

   탕천궁湯泉宮을 건설하였다. 당현종唐玄宗 개원開元, 천보天寶년간 확대건설을 통하여 새롭게 궁전을 세우고

   이름을 '화청궁'이라 불렀다.

화청지는 앞서 말한대로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하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745년부터 755년까지

   매년 10월이면 추위를 피하여 당현종이 양귀비와 여러 대신들을 대리고 화청지에 왔다가 이듬해 봄이 되여야

   장안성으로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그동안 정사를 처리하고 국사를 의논하며 사절를 접견하는 일들은 모두 여기에서

   진행해야 했으므로 화청지는 점차적으로 당시의 정치중심으로 되여 버렸다. 천보 14(755) 안사의 난이

   일어나 현종이 성을 버리고 양귀비와 그 자매를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갔다. 이때부터 화청지는 차츰 황폐해지기

   시작했고 정치, 경제의 중심이 바뀜으로 그의 특수성지위도 잃었다.

화청지는 중국 현대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361212일 중외를 들썽케 한

   서안사변西安事變이 바로 이곳에서 발생하였다. 장개석蔣介石은 장학량張學良에게 공산당 토벌을 명하려 왔다가

   국공합작을 주장하던 장학량에게 쫓겨 이곳에 숨어 있다가 결국 체포되어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화청지에는

   아직도 사변 당시 장개석이 사용하던 오간청五間廳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건국 후 여러 차례의 수리와 확대건설을

   통해 비록 당나라때 번성할 때와 비기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양귀비 상.

 

 

당현종과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던 그... 아담하다.

 

 

 

 

 

 

 

 

 

 

대륙답게 하도 탕이 많아서, 그리고 오래 전이라 저 전각 안에 저 탕이 있었던 건지도 가물가물...

 

2007년 1월 23일의 시간을 이제서야 여기에 담다.